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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 진상眞像

  • 작성자 : 김상국
  • 작성일 : 2008.06.17
  • 조회수 : 5236



김인후(金仁厚,1510 - 1560) 호: 하서(河西),담재(湛齋). 시호: 문정(文正).

조선 중기의 유학자, 서예가.


1. 서 문

하서(河西)는 전남 장성 출생으로 본관은 울산(蔚山).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博士)·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지냈다. 43년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명종이 즉위하고, 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에 병을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성경(誠敬)의 실천을 목표로 하였다.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반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고 시문을 잘 지었으며, 글씨는 행(行)·초(草)에 뛰어났다.

광주에서 황룡강을 따라 장성 맥동마을로 가면 거북등에 세워진 비가 하나 있다. 눈여겨 보면 송시열이 쓴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인물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비한 탁월한 이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고, 이 셋중 어느 한두 가지에 뛰어났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하였다."

조선 중엽 호남 북쪽에는 이항 남쪽에는 김인후,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는 역사서에서 보여지듯이 김인후의 학덕은 크고 넓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훈구 재상들이 젊은 문신들을 내몰아 죽이거나 혹은 유배시켰 던 때이며 기묘사화가 일어나 참화를 당했던 일군의 뛰어난 학자들이 정치 사회 혼란 속에서 뜻을 펴지 못한 채 은거하여 독서에만 전념하던 시기이다.

그는 19세에 과거에 응시해 장원이 된 후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지 20년 되던 해 동궁에 대화재가 났다. 아무도 조광조 등 사림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거론을 못하던 때 하서가 나서서 왕에게 군자의 도를 전언했다.

"예로부터 善治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면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깝게 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의 기묘사화는 죄가 아니심을 밝히시고 날로 두려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정의와 악을 잘 가려서 사회기강을 세우시옵소서."

그러나 중종이 이 상소를 흔쾌히 윤허하지 않자 하서는 부모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니 옥과현감에 제수되었다. 시대는 어지럽고 또 어지러웠다.

2. 낙향하여 학문정진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1545년 겨울에 병을 핑계로 고향인 장성으로 낙향하였다. 다음은 인종을 애원(哀怨)한 나머지 단장의 피를 토하면서 쓴 사모곡이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에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질 않네
세상사 흐르는 물 잊혀지련만
젊은 시절 해로할 임 여의고 나니
눈 어둡고 머리 희고 이가 빠졌소
슬픔 속의 봄 가을 몇번이던가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있다오
백주는 옛대로 물가에 있고
고사리는 해마다 돋아납니다
오히려 부럽구려 주나라 왕비
생이별이야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실망을 떨치고 심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열중하기 시작하여 <태극도설>과 <서명>을 완역해 수천번 읽더니 48세 때<주역관상도> <서명사천도>를 저술하고 이를 배우는 자들에게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강기니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죽통을 부레로 연결시켜 둥근 하늘의 형체같이 만들고 배분을 사용하여 그 위에 그리되 일월성신이 북극을 잡고 빙둘러 한바퀴 돌면 좌시하는 형상의 도표를 짜냈다.

우주의 진리를 과학을 이용해 풀어내는 작업을 16세기 이 선현이 해낸 것이다. 특히 하서는 저서를 통해 유교적 입장에서 불교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불교의 출가 삭발은 제 몸 하나 편하자고 천리를 어겨 인륜을 끊고 부모에게 받은 몸을 해하는 것으로 큰 불효라고 말했다. 꺼진 불이 다시 타지 못하고 마른 물이 다시 흐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은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살다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게 된다는 것. 따라서 불교의 윤회설,극락이나 지옥은 있을 수 없으며 혹은 말로만 있는 것이다 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물질의 질료라 할 수 있는 氣가 없어지면 그에 따라 그 물질의 존재와 운동의 까닭인 理도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그는 '무에서 무엇을 얻느냐'며 불교의 공사상까지도 공격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머무를 때는 기대승에게도 가르침을 주었으며, 이황과도 교분을 가지면서 이황의 딸을 며느리고 삼았고, 양산보의 아들과 유희춘의 아들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그는 양산보의 소쇄원을 둘러보고 <소쇄원 사십팔영> 을 통해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또한, 하서 김인후는 전북 순창군 쌍치면의 산골 학사(學舍) 훈몽재에서 송강 정철, 고암 양자징, 월계 조희문, 금강 기효간, 호암 변성온, 덕계 오건, 고반 남언기, 진사 서태수, 죽헌 김제안, 돈암 양산해, 청계 박원군 등 성리학자 50여명을 배출했다


3. 일생 마침

논설과 의리가 평이하고 명백했던 선비 김인후는 1560년 정월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수를 갖추어 사당에 행전케하라'더니 의관을 단정히 하고 무릎을 끓고 앉아 제사를 모시면서 자녀에게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말라'고 유언하고 이튿날 유연히 세상을 떠났다.

서슬퍼런 임금의 폭정을 피해 고향에 침거하면서 집안 다스리기를 나라 다스리듯 했던 냉철한 선비 하서 김인후. 지식과 행동 내면과 외면의 수양을 다같이 중시한 이 선비는 '行에 열심이고 知에 간략하며 안에 소흘하고 밖에 힘쓰는'선비들을 자주 꾸중하곤 하였다.

그가 남긴 1,600수의 시를 보면 침묵의 언어를 알 것 같다. 준엄한 언어로 인간 내부에 잠적된 영혼의 육신을 회생시키는가 하면 지극히 감미로운 사랑의 훈육으로 존재의 깊은 심연을 느끼게 한다.
큰 선배의 도덕성과 절개, 고집과 사상, 빛나는 문장을 더듬어보라. 깊은 산속에서 선붉은 야생화를 만났을 때처럼 놀랍고 조심스럽다.

저서에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4. 주요 유적지

-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
-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 생가
- 광주광역시 중흥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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